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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표준 사양품인데 사급으로 돌려도 되는거에요? 꼭 도급 진행해야 돼요?”

“네? 사… 사급이요?”

회사에서 말하는 소위프로세스라는 명분을 핑계삼아 정해진 절차대로만 일을 하는데 익숙해지다 보면 스스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위의 상황이 그렇다. 사급(賜給)과 도급(都給). 만약 제조업에서 구매일을 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들어볼 일이 없었을 수도 있었을 생소한 단어다. 그나마 도급은 하도급법이니 뭐니 해서 뉴스에서 한 두 번쯤 들어봤지만, 사급이라는 단어는 온전히 회사 덕분에 알게 된 단어다. 어렴풋이 구매팀이 판매자를 대신해서 일부 부품(이나 자재)을 사준다는 개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도 몰라서야 내 밑천이 드러날 터. 이 참에 한 번 정리를 해보기로 한다.


사급과 도급의 정의

 사실 사급과 도급의 정의는 매우 광범위한데, 여기서는 제품의 생산에 필요한 원료(原料)를 조달하는 방식으로 범위를 좁혀 설명하고자 한다. 도급은 간단하다. 거래에 있어 구매자와 판매자가 있다면, 특정 원료에 대해 판매자가 직접 조달을 하면 도급방식이라고 한다. 반대로 사급은 구매자가 원료를 조달하여 판매자에게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행기의 기내식을 예로 들어보자. 우선 기내식의 거래에 있어 구매자는 항공사가 될 것이고, 판매자는 기내식 제조업체가 될 것이다. (관련 업계에서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실제 현황과 다를 수 있다.) 하나의 기내식에는 여러 재료가 들어간다. , 돼지고기, 당근, 소스 등등. 이러한 재료들은 기내식 제조업체에서 직접 재배를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아마 외부로부터 사들이거나 하는 방식으로 조달을 할 것이다. 여기서 조달활동을 하는 주체가 어디인지에 따라 도급과 사급이 갈린다. 만약 쌀을 기내식 제조업체(판매자)에서 직접 조달한다면 도급이고, 항공사(구매자)에서 대신 조달하여 기내식 제조업체(판매자)에게 공급한다면 사급이 된다.

 여기서 사급은 또 유상사급과 무상사급으로 나뉜다. 유상사급은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원료를 공급할 때 돈을 받고 파는 것이고, 무상사급은 말 그대로 무상으로 공급하는 방식이다. 이 부분이 조금 헷갈리니 다시 한 번 기내식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유상사급은 쌀밥이 포함된 기내식에 대해 항공사와 기내식 제조업체 간에 100원의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10원에 해당하는 쌀에 대해서는 항공사에서 기내식 제조업체에 판다. 나중에 비용을 정산할 때 항공사는 기내식 제조업체에 쌀값 10원을 뺀 90원을 기내식 제조업체에 지불한다. 반면에 무상사급의 경우, 항공사에서 쌀을 기내식 제조업체에 무상으로 제공한다. 대신 쌀값을 제외한 90원의 계약을 맺는다. 당연히 항공사가 지불하는 금액은 90원이다. 뭐가 다르냐고? 결과적으로 항공사가 지불하는 금액은 같지만, 계약을 100원으로 맺는지 90원으로 맺는지의 차이가 있다. 구체적으로는 회계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데, 이 부분까지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지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사실 잘 모른다


사급의 장단점

 도대체 왜 사급을 하는 것일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원가 절감이다. 특정 원료에 대해 판매자가 조달하는 것보다 구매자가 조달하는 것이 더 저렴한 경우 보통 사급을 진행한다. 계속 기내식으로 예를 들었으니 상황을 좀 더 확장해보자. 항공사에서 비빔밥과 볶음밥으로 두 종류의 기내식을 공급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때 비빔밥은 A업체로부터 공급을 받고, 볶음밥은 B업체로부터 공급을 받는다. 비빔밥과 볶음밥 모두 쌀이 필요하다. 두 업체가 도급으로 직접 조달한다면 10원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항공사에서 조달하여 A B업체에 각각 공급(사급)한다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항공사에서 구매한다면 각 기내식 업체가 구매하는 것보다 구매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10원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때 쌀을 사급으로 진행한다면 전체 기내식의 원가 절감이 이뤄지는 셈이다. 여기서는 물량을 예로 들었지만, 기내식 제조업체가 해당 품목에 대해 수입허가가 없는 경우라던가, 구매자에게만 면세혜택이 이뤄지는 경우 등 여러 사유로 인해 사급을 한다.

 

 그렇다면 원가 절감이 가능하다면 무조건 사급을 진행해야 할까? 실제 상황은 예시보다 훨씬 복잡하다. 사급을 진행하려면 우선 구매자는 해당 품목을 조달해야 한다. 여기서 조달을 위한 관리비용이 추가로 발생한다. 대부분 구매를 통해 조달이 이뤄지기 때문에 완제품(기내식)을 구매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급품()에 대한 구매행위가 이뤄진다. 따라서 사급으로 인한 원가 절감폭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경우, 오히려 전체적인 비용은 증가할 수도 있다. 게다가 사급 품목에 품질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구매자 측에서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도급일 때는 당연히 판매자가 책임을 져야하지만, 사급일 때는 구매자 측이 공급하였기 때문에 책임을 요구할 수 없다.

 

 판매자 입장에서도 단점이 있다. 우선 원가 정보의 누출이다. 당연하겠지만 어떤 회사도 판매하는 품목에 대해 원가 정보가 공개되는 걸 원치 않는다. 하지만 사급을 진행하게 되면 불가피하게 원가 정보가 공개될 수 밖에 없다. 더 나아가 공개된 원가를 바탕으로 공개되지 않은 부분까지도 유추가 가능해지기 때문에, 결국에는 구매자로부터 가격 인하의 압박을 받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외에도 판매자에 대한 의존도가 떨어져 구매자가 쉽게 거래업체를 변경할 수 있게 되는 문제도 발생한다. 구매자의 입장에서재료는 우리가 다 구해줄 테니깐 판매자는 임가공만 해라라고 생각한다면, 임가공 기술만 있는 업체라면 누구와도 거래가 가능해지므로 쉽게 업체를 변경할 수 있다.


 

 사급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뚜렷하므로 다각도의 방면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특히 실제 업무를 하는 구매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그게 무엇일까? 앞서 사급의 단점 중에 관리비용이 증가한다고 언급했는데, 그 관리비용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바로 나의 노동력이다. 실제 업무에서 사급품이 증가할수록 나의 노동강도도 비례하여 증가한다. 만약 사급의 효과가 미비한데 괜히 사급을 진행했다간, 그 역효과는 고스란히 담당자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사급 전환에 대해 검토문의가 올 때마다 내 머리는 지끈지끈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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